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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골목길 4...청계천·미아리 ③

대중가요의 골목길 4...청계천·미아리 ③

  • 기자명 조용연 여행작가
  • 입력 2020.10.26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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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진 현대사의 고개, 배호의 창신동에서 미아리까지

창신동 그 가난한 판자촌은 배호가 부모를 따라 중국에서 귀국해 보낸 유년의 공간이다. 채석장의 절벽은 높고 연못은 깊었다. 잠시 산 부산에서 중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상경해 외삼촌 악단의 견습으로 시작한 배호의 음악 인생, 그의 노래가 본격적으로 피어나는 청계천 언저리를 천천히 지나간다. 나는 대중가요에서 가장 완벽한 음을 구사한다는 가수 배호의 천재성을 지금도 안타까워하는 수많은 가요 팬의 한 사람이다. 미아리고개를 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배호를 따라가 본다. 거기에는 우리 가요사의 또 하나의 별 반야월 선생이 <단장의 미아리고개>로 포연 자욱했던 통한의 ‘6.25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미아리는 영원히 우리 가슴에 아로  새겨진, 쓰라린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길목이다.

한 많은 미아리고개, 점집에 의탁하는 갑갑한 세상

전차도 힘이 들어 넘을 수 없는 미아리고개가 막 시작되는 언덕 좌우에는 점집의 깃발과 철학관 간판이 즐비하다. 1966년 시각장애 역술이 이도병이 서울역 앞 양동 ‘맹인역술인 판자촌’이 철거되면서 돈암동 전차 종점에 가까운 미아리고개 아래로 이사해왔다. 길거리에서 시작하여 80년대는 한 때 100여 명의 장애인 역술인이 몰려들었고, 돈을 벌어 집도 사 눌러앉았다. “영혼은 북으로 드나든다. 서울의 북북동은 영혼의 길, 북두신앙이 기대는 방위다. 사람의 영혼, 운세를 다루는 길과 맞아 떨어지는 방위가 북쪽이다”라고 맹인역리학회 심남용은 증언한다. 미아리고개 정상에는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가 있다. 돌에다 새긴 비석이 아니라 철판에 가사를 용접으로 파낸 독특한 조형물이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 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 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단장의 미아리 고개>,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 1956, 오아시스>

이 노래는 남편과 아내의 생이별을 주제로 하지만 미아리에 살던 전설의 가요시인 반야월이 6.25 난리 통에 죽은 둘째 딸 수라를 잃고 찢어지는 가슴으로 민족의 아픔을 이입하여 지은 노랫말이다. 거기에 한국 가요의 슈베르트라 불리는 이재호가 곡을 붙인 불후의 명곡이다. 미아리를 온 국민에게 알린 공으로 말하자면 이 노래만한 것이 있겠는가.

요즘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미스트롯의 ‘진’에 오른 송가인이 정통 트로트의 진수를 보여주며 바로 이 노래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노래비를 물어물어 찾아가서 나는 탄식했다. 노래비 앞에 가건물을 지어 막아 놓은 ‘미아리고개 예술극장’의 무신경 때문이다. 이 단체는 서울시 보조를 받는 ‘공연장 상주단체육성지원사업’의 수혜자다. 미아리고개에 예술극장이란 간판을 달게 된 게 솔직히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 덕분이 아니란 말인가. 조석으로 노래비 앞에 예를 올리지는 못할망정 이 무슨 무례이며 몰염치인가. 

노래비에 적힌 가사만 해도 그렇다.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이라고 했지만 원래는 ‘꼭꼭 묶인’이 원 가사다. 물론 발음이 편하게 그리 부른다지만 반야월이 생전에 늘 지적했던 대목이다. 한술 더 뜨는 노래를 들어보자.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아주오래 전에 미아리고개/ 울며불며 매달리던 눈물고개/ 오늘날의 현재 미아리 고개/ 갈테면 가라지 냅두는 고개/ 내가 뭐 잡을 줄 아니 천만의 만만의 콩떡/ 여자답게 상냥하게 보내는 거야/ 미아리 눈물고개 니가 떠난 이별 고개/니가 없어도 남자는 많아/ 갈테면 어서 가라지/ 행여 나에게 돌아올 생각/ 꿈에도 하지 말아줘 (후렴 반복) 닐니리 닐리 늴리리  <신 사랑 고개>,  정의송 작사·곡, 금잔디 노래>

이제 창자를 끊어 내는 슬픔이라는 ‘단장(斷腸)’의 의미를 아는 세대가 사라져 가는 풍경이라고는 하지만 이 노래는 반야월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면 대노했을 게 분명하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 어느 구절이 울며불며 매달리던 눈물고개이던가. 포로가 되어, 납북되어 끌려가는 남편을 안타깝게 발을 구르면서도 어찌할 수 없어 창자가 찢어지는 아픔으로 통곡하는 이별이 아니던가. 아무리 통통 튀는 이즈음 노래라고 하지만 인고의 세월을 그래도 견디며 어린 자식을 키워낸 아내이자 그 시절 어머니를 얕잡아 보는 사설(辭說)이다.  

미아리고개를 가로지르는 육교에서 바라보는 미아리는 그저 편안해 보인다. 미아리는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 살던 마을이었다. 가수 임희숙이 살던 미아리, 전라도 광주에서 가수가 되어 보겠다고 상경한 김연자가 살던 미아리가 그랬다. 배호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도 미아리였다. 병세가 짙어져 입·퇴원을 반복하던 그는 세브란스병원에서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미아리고개를 넘지 못했다. 앰브란스 속에서 막내 외삼촌 김광빈의 무릎을 베고 세상을 떠났다. 1971년 11월 7일 스물아홉 살의 일이다. 저기 단숨에 미아리 고갯길을 올라오는 긴 차량 행렬이 현대사의 벼랑을 피눈물로 지킨 보람이라면 그나마 위안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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